휴 윌로비 1553년 북동 항로 탐험

1554년 봄, 러시아 어부들은
낯선 서양 범선 두 척을 발견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63명이, 마지막 동작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63 동사한 선원
3 출항 선박
0 생존자
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
휴 윌로비 경 초상화 — 16세기 튜더 시대 귀족 군인 휴 윌로비 경 — 전해 내려오는 흑백 판화를 AI로 채색

바다를 모르는 지휘관

항해 경험이 전혀 없는 군인이 북극 탐험대의 총지휘관이 되었다. 휴 윌로비 경은 스코틀랜드 전쟁에서 이름을 날린 군인 귀족이었지만, 후원자인 서머셋 공작이 반역죄로 처형되면서 갈 곳을 잃었고 바다로 눈을 돌렸다. 상인들은 그의 명성과 체격을 보고 택했다. 실제 항법은 경험 많은 리처드 챈슬러에게 맡겨졌다.

이들을 후원한 상인 모험가 회사는 240명의 투자자가 출자한 역사상 최초의 주식회사 형태였으며, 유럽에서 아시아로 통하는 북동 항로 개척이 목표였다.

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400년간 아무도 몰랐다.

세 척의 선박

윌로비와 함께한 두 척, 62명은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다

보나 에스페란자 호

전원 사망
지휘관: 휴 윌로비 경 (총지휘관) 120톤 · 34명 승선

원정대의 기함. 모직물·주석과 18개월치 식량, 온갖 화포를 싣고 출항했다. 후대의 기록에 따르면 윌로비의 시신은 선실에서 펜을 쥔 채 발견되었다고 전해진다. 1556년 회수됐으나 노르웨이 해안 폭풍에 영영 실종됐다.

에드워드 보나벤처 호

임무 성공 후 침몰
지휘관: 리처드 챈슬러 (항법사 총괄) 160톤 · 49명 승선 (최대선)

세 척 중 가장 큰 배. 세 척 중 유일하게 목적지에 도달했다. 그러나 이 배도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

보나 콘피덴시아 호

전원 사망
지휘관: 코넬리우스 더포스 90톤 · 28명 승선 (최소선)

세 척 중 가장 작은 배. 폭풍에서 에스페란자와 합류했으나, 함께 바르지나강 하구에 갇혀 윌로비와 운명을 같이했다. 1556년 노르웨이 해안에서 난파됐다.

탐험 타임라인

1553년 5월 출항부터 1556년 침몰까지

1553년 5월 10일

런던 출항

보나 에스페란자 호(34명), 에드워드 보나벤처 호(49명), 보나 콘피덴시아 호(28명) 세 척이 템스강 래트클리프에서 출발했다. 하늘색 옷을 입은 수병들이 노를 저었고, 그리니치 궁전 앞을 지날 때 예포를 쏘아 올렸다. 추밀원 의원들이 창문으로 내다보았고, 시민들이 강변에 빽빽하게 서서 구경했다.

"언덕 꼭대기에까지 그 소리가 울렸으며, 골짜기와 수면이 메아리를 돌려주었다. 수병들은 하늘이 다시 울릴 정도로 함성을 질렀다."
— Clement Adams, Chancellor 구술 기록

에드워드 6세는 병중이라 직접 보지 못했다. 그는 이 출항 2주 후 사망한다.

총 111명 승선
1553년 7월 30일

⚡ 폭풍으로 함대 분리

1553년 7월 30일 북케이프 근방, 폭풍 속에서 갈라지는 함대 북케이프 근방, 운명을 가른 폭풍 — AI 생성 이미지

노르웨이 해안을 지나며 낙오 시 바르되후스 요새에서 집결하기로 약속했지만, 북케이프 근방에서 격렬한 폭풍이 덮쳐 에스페란자 갑판 위의 소형 보트가 산산조각 났다. 다음 날 아침 콘피덴시아는 찾았지만, 챈슬러의 에드워드 보나벤처 호는 보이지 않았다.

"폭풍 속에서 윌로비가 챈슬러에게 '기함을 따라오라'고 외치는 큰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에스페란자는 돛을 모두 펴고 너무 빠르게 내달려,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 Hakluyt, Principal Navigations
운명을 가른 폭풍
이 순간부터 두 운명이 갈린다
챈슬러 백해 → 모스크바 → 역사적 성공
윌로비 표류 → 바르지나 → 전원 동사
1553년 8월 (챈슬러)

챈슬러, 백해 진입 성공

바르되후스에서 7일을 기다렸다 포기한 챈슬러는 동쪽으로 항해를 계속했다. 유럽인 최초로 백해에 진입해 드비나강 어귀에 정박했으며, 니콜라스 수도원 근처 냐노크사에 상륙했다.

역사적 성공
1553년 8월 14일 (윌로비)

노바야젬랴 해안 발견

윌로비의 두 선박은 방향을 잃고 동쪽으로 항해하다 새와 오리가 가득한 무인 해안에 도달했다. 이 땅은 후에 노바야젬랴 섬(러시아어로 "거위 땅")으로 밝혀졌다.

1553년 9월 18일

콜라 반도 바르지나강 하구 투묘

콜라 반도 북쪽 해안, 바르지나강 하구의 작은 만에 피항했다. 인근에서 십자가 표식 등 인간 활동 흔적을 발견했지만, 사람은 찾지 못했다. 세 방향으로 수색대를 보냈으나 모두 빈손으로 돌아왔다.

"이 항구에서 일주일을 머무르며, 서리·눈·우박이 내리는 것이 마치 한겨울 같은 것을 보고, 여기서 겨울을 나는 것이 최선이라 판단했다."
— 윌로비 자필 일지, Hakluyt 수록
최후의 기착지
1553년 9~10월

윌로비, 일지 기록 중단

겨울이 깊어지며 동물들이 따뜻한 곳으로 떠났다. 두꺼운 얼음이 어업을 막았고, 빙하가 서서히 두 선박을 포위했다. 남남서, 서쪽, 남동쪽 세 방향으로 수색대를 보냈지만 사람도, 사람이 살던 흔적도 찾지 못했다. 이 기록을 마지막으로 일지가 끊겼다.

"Here endeth Sir Hugh Willoughbie his note, which was written with his own hand."
— Hakluyt 편집 주석
1554년 1월

유언장 — 마지막 문서 기록

윌로비의 친족이자 동행 상인이었던 가브리엘 윌로비가 유언장을 작성했다. 이 시점에 대부분의 승조원이 아직 살아 있었다는 사실이 이 문서를 통해 역으로 증명된다. 봄이 오면 살 수 있으리라 믿었을 것이다.

이것이 원정대에서 나온 마지막 문서 기록이다. 1월 이후 어느 시점에서 63명 전원이 사망했지만,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마지막 기록
이후 어느 시점에, 63명 전원이 사망했다.
우리는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영영 알 수 없다.
1555년 봄

러시아 어부들, 유령선 발견

1555년 봄, 러시아 어부들이 얼음에 갇힌 두 척의 유령선을 발견한 장면 얼음에 갇힌 두 척의 서양 범선을 발견한 러시아 어부들 — AI 생성 이미지

계절 어업을 위해 돌아온 러시아 어부들이 바르지나강 어귀에서 낯선 두 척의 서양 배를 발견했다. 선내에는 약 63구의 시신이 있었다. 소식은 모스크바의 영국 상단에 전해졌고, 베네치아 런던 대사 지오반니 미켈이 본국에 상세히 보고했다.

"한 손에 펜을 든 채 앞에 종이를 두고, 다른 이들은 손에 접시를 들고 입에 숟가락을 문 채로, 또 어떤 이는 사물함을 열다가, 마치 그 자세로 고정시켜 놓은 듯한 조각상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 Giovanni Michiel, 베네치아 대사 보고서 (1555). 어부→러시아 관리→대사의 3차 전달이므로 과장 가능성 있음.
약 63구의 시신 발견

인터랙티브 항로 지도

지도 위의 마커를 클릭하면 각 지점의 상세 정보를 볼 수 있습니다. 금색 선은 함대가 함께한 구간, 이후 붉은 선이 윌로비, 파란 선이 챈슬러의 항로입니다.

공동 항로
윌로비 항로 (비극)
챈슬러 항로 (성공)
출발 / 경유지
조난 / 사망지

죽음의 미스터리

400년 이상 풀리지 않았던 의문 — 63명은 어떻게 죽었는가

전통적 가설

동사와 괴혈병

400년 이상 학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북극의 혹독한 추위와 괴혈병이 원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결정적 반증이 있었다. 베네치아 대사 지오반니 미켈의 보고서에는 "선박에 식량이 가득 남아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었으며, 모두 동시에 사망했다는 정황은 기아나 괴혈병으로 설명되지 않았다.

1986년 학설

현대의 정설

일산화탄소 중독

밀폐된 선실 안에서 석탄 화로 앞에 얼어붙은 선원들 — 일산화탄소 중독 재현 펜을 쥔 채, 숟가락을 든 채, 사물함을 열다 — AI 생성 이미지

1986년 학자 엘레아노라 C. 고든이 제시한 설명. 북극 나무가 귀했던 환경에서 석탄을 연료로 사용하면서, 추위를 막기 위해 선박의 모든 구멍과 창을 막았다. 밀폐된 공간에서 석탄 연소가 일으킨 무색무취의 일산화탄소가 63명 전원을 동시에 쓰러뜨렸다.

핵심 증거:
  • 식량이 풍부하게 남아 있었음 (기아 아님)
  • 동시다발적 사망 정황 (갑작스러운 독가스)
  • 펜을 쥔 채, 식사 중에, 사물함을 열다가 — "동상" 자세
  • 1596년 바렌츠 탐험대의 동일 증상 기록 (두통·어지럼증)

비교 사례

1596년 바렌츠 탐험대

네덜란드 탐험가 빌럼 바렌츠의 세 번째 북극 탐험에서 노바야젬랴에 갇힌 선원들이 동일한 증상을 경험했다. 게리트 드 베어의 일기에는 "머리가 몹시 띵하고 어지러웠다"는 기록이 있으며, 문을 열어 찬 공기를 마시자 회복됐다고 전한다.

바렌츠의 선원들은 문을 열어 살아남았다. 윌로비의 선원들은 열지 못했다.
만약 환기구 하나만 열어두었다면 — 63명은 봄까지 살았을 수도 있다.

열매를 보지 못한 사람

윌로비의 유족에 대한 공식 보상이나 추모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오히려 1613년, 회사는 윌로비가 스피츠베르겐을 "발견했다"는 완전한 허구를 내세워 포경 독점권을 따냈다. 당대 기록은 이를 "purely imaginary discovery(완전히 허구의 발견)"라 평했다. 죽은 뒤에도 그의 이름은 회사의 이익을 위해 쓰였다.

그 회사는 윌로비의 죽음 위에 세워졌다. 유일하게 살아 돌아온 챈슬러가 이반 뇌제에게서 얻어낸 무역 특권과, 윌로비의 비극이 증명한 항로의 가치가 뮈스코비 회사의 기반이었다. 모피·왁스·타르·목재가 런던으로 흘러들었고, 이 무역은 1917년 러시아혁명까지 300년 이상 지속됐다. 챈슬러 역시 그해 귀환길에 스코틀랜드 해안에서 익사했다. 윌로비도, 챈슬러도, 세 척의 배 모두 — 아무것도 돌아오지 못했다.

윌로비가 꿈꾸었던 북동 항로는 그로부터 319년 뒤인 1872년, 스웨덴의 노르덴셸드에 의해 비로소 완전 항해에 성공했다.

현재의 바르지나강 하구 — 470년이 지난 지금도 영구 거주민이 없는 러시아 북극 오지 바르지나강 하구, 현재 — AI 생성 이미지

470년이 지난 지금도 바르지나강 하구에는 영구 거주민이 없다. 차로는 닿을 수 없고, 헬리콥터를 전세 내어야 접근할 수 있는 러시아 북극해 연안의 오지다. 그 겨울 이후, 누구도 다시는 그곳에 머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