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에다 도시이에 초상 — 창의 마타자 시절, 주칠 장창을 든 청년기

마에다 도시이에 완전 정리 — 가가 100만석의 시조 생애 총망라 (2026)

Q: 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는 누구인가?

A: 오와리 아라코(현 나고야) 출신의 전국시대 무장(1538~1599). 오다 노부나가의 소성(小姓)으로 출사하여 아카호로슈(赤母衣衆) 필두로 활약, “창의 마타자(槍の又左, 야리노 마타자)“라 불렸다. 주아미(拾阿弥) 참살로 한때 파문당했으나 공을 세워 복귀, 에치젠 부중 3만 3천 석·능등 23만 석을 거쳐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 휘하 북륙 방면군에 속했다.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 이후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진영으로 돌아서, 훗날 “가가 100만석(加賀百万石)“이라 불리는 영지의 기반을 마련했다. 도요토미 정권 말기 오대로(五大老)의 한 사람으로 히데요리의 후견 책임(傅役, 후야쿠)을 맡아 이에야스를 견제했으며, 1599년 62세로 병사했다. 그의 사후 가가번(加賀藩)은 외양 다이묘(外様大名) 중 최대 석고인 공칭 102만 5천 석의 번으로 에도 시대 내내 존속했다.


한눈에 보는 마에다 도시이에

항목내용
이름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 まえだ としいえ)
유명(幼名)이누치요(犬千代)
통칭마고시로(孫四郎) → 마타자에몬(又左衛門)
생몰1538년 1월 15일(天文7年 12月 25日) ~ 1599년 4월 27일(慶長4年 閏3月 3日) — 향년 62
출신지오와리국 아이치군 아라코(尾張国 愛智郡 荒子, 현 나고야시 나카가와구)
가문아라코 마에다씨(荒子前田氏)
정실마츠(まつ, 芳春院, 호슌인) — 외사촌
자녀정실 소생 2남 9녀 + 서자 2남
최종 관직종2위 권대납언(従二位 権大納言)
최종 영지가가(加賀)·능등(能登)·엣추(越中) 3국 약 83만여 석
별명창의 마타자(槍の又左)
사후 체제가가번(加賀藩) 전조, 가가 100만석의 시조
보리사(菩提寺)가나자와 호엔지(宝円寺), 코야산 오쿠노인(高野山奥之院)
마에다 도시이에 생애 영지 변천 — 선형 비례 수평 막대 차트 1538 출생 약 4,000석 1569 가독 상속 약 5,000석 1575 에치젠 부중 3만 3천석 1581 능등 영주 23만석 1583 시즈가타케 후 약 45만석 ← 결정적 증가 1585 도야마의 역 후 약 76만석 1599 사망 시 약 83만석 — 도시이에 사망 (1599) — 1600 세키가하라 후 122만 5천석 (사후)

도시이에 생애 영지 변천. 막대 길이는 석고에 선형 비례. 1583년 시즈가타케 직후와 1600년 세키가하라 직후 두 시점이 결정적 증가 구간이다.


도시이에의 생애는 세 개의 큰 변곡점을 지난다. 파문과 복귀, 시즈가타케에서의 전향, 임종 직전 이에야스와의 대면 — 이 세 장면이 그의 62년을 관통한다. 각 장면은 단지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당대 무가 질서 전체가 뒤집히는 순간과 맞물려 있다. 도시이에가 어떻게 오와리 말단 토호의 넷째 아들에서 가가 100만석의 시조가 되었는지를 추적하는 일은, 전국시대가 어떻게 에도 시대로 넘어갔는지를 한 인물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일이기도 하다.

아래는 사료에 근거한 연대기적 서술이다. 확실한 사실과 전승을 구분하고, 사료의 출처를 가능한 한 명시했다.


1. 오와리 아라코의 넷째 아들 (1538~1551)

1-1. 출생과 가문

통설은 덴분(天文) 7년 12월 25일(양력 1539년 1월 15일)을 생일로 본다. 전거는 마에다 가문 측 기록인 『쇼운코고코키(松雲公御考記)』다. 근년 히데요시와 동갑인 덴분 5년(1536)설, 이를 수정한 덴분 6년(1537)설도 제기되었으나, 주류 학계는 여전히 1538년을 채택한다.1

출생지는 오와리국 아이치군 아라코무라(尾張国 愛智郡 荒子村), 현재 나고야시 나카가와구 아라코초(荒子町)에 해당한다. 당시 아라코는 아라코성(荒子城)을 거점으로 한 작은 재지 영주의 영지로, 석고(石高)가 아닌 관고(貫高) 단위로 2,000관(貫)이었다.2 관고 2,000관은 근세 초의 환산 기준으로 대략 4,000~5,000석에 해당하는 규모로, 오다 가문의 한 중급 가신 가문 수준이었다.

부친은 마에다 토시마사(前田利昌, 또는 利春, ?~1560). 오다가 필두 가로 하야시 히데사다(林秀貞)의 요리키(与力)였다. 모친은 쵸레이인(長齢院)으로 오와리 타케노(竹野)씨 출신이다. 이 모친이 훗날 도시이에의 정실이 되는 마츠(まつ)의 이모이기도 하다. 즉 도시이에와 마츠는 외사촌(従兄妹, 쥬쿄다이) 관계에서 부부가 된다.3

마에다 가문의 출자는 명확하지 않다. 가문 측에서는 스스로 스가와라 미치자네(菅原道真)의 후예라 칭했고, 가문(家紋)인 우메바치(梅鉢, 매화)도 이에 기인한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미노(美濃) 마에다씨의 서류(庶流)가 오와리 아라코로 이주한 가계로 추정하며, 스가와라 계보는 후대의 창작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4

토시이에는 4남이었다. 형제는 장남 마에다 토시히사(前田利久), 차남 토시사다(利玄), 삼남 마에다 야스카츠(前田安勝, 후일 도시이에의 가신이 되어 나나오성의 성대를 맡음), 4남 토시이에, 5남 사와키 요시유키(佐脇良之,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전사), 6남 마에다 히데츠구(前田秀継, 덴쇼 대지진으로 키부네성 붕괴 시 부부 압사) 순이다.5

1-2. 유명 이누치요

유명은 이누치요(犬千代, いぬちよ). 오와리 지역에서 “개는 잘 자라고 무병하다”는 속설에 따라 장남·차남이 요절한 집안에서 아이의 무사한 성장을 기원하며 붙이는 이름이었다.6

1551년(텐분 20년) 1월, 14세에 노부나가의 소성(小姓, 고쇼)으로 출사한다. 이때 마에다 가문은 여전히 하야시 히데사다의 요리키였고, 히데사다는 후일 노부나가의 동생 노부유키(信行, 통칭 信勝)를 옹립하려 움직이게 된다. 그럼에도 도시이에는 히데사다가 아닌 노부나가 직속에 배속되었다. 당시 노부나가는 18세, 도시이에는 13~14세였다.7

같은 해 원복(元服)을 치르고 마고시로 토시이에(孫四郎利家)로 이름을 고쳤다.


2. 창의 마타자 — 카부키모노 시절 (1552~1558)

2-1. 초진 카야즈 전투 (1552)

이듬해인 1552년(텐분 21년), 오와리 하사군(下四郡)을 지배하던 오다 야마토노카미가(織田大和守家, 키요스 오다씨)의 기요스성(清洲城) 성주 오다 노부토모(織田信友)와 노부나가 사이에 카야즈 전투(萱津の戦い)가 벌어진다. 도시이에는 이 전투에서 초진(初陣)을 치렀다.

『무라이 시게요리 각서(村井重頼覚書)』에 따르면, 그는 스스로 주칠(朱塗)한 3간반(三間半, 약 6미터 30센티미터)의 장창을 들고 적진에 뛰어들어 수급 하나를 취했다. 3간반 자루의 창은 당시 표준인 2간(약 3.6미터)의 거의 두 배로, 통상적인 취급 범위를 넘어서는 치수였다. 노부나가는 이 소식을 듣고 “키모니 케가 하에테오루와(肝に毛が生えておるわ, 배짱에 털이 났구나)“라 평했다고 전한다.8

2-2. 이노우 전투와 우안의 화살 (1556)

1556년(코우지 2년) 8월, 노부나가와 그의 동생 노부유키(信行, 信勝)가 오와리 내에서 격돌한 이노우 전투(稲生の戦い)에서 도시이에는 노부나가 측에 섰다. 노부유키 측 소성두(小姓頭) 미야이 칸베에(宮井勘兵衛)를 토벌하는 공을 세웠는데, 이 과정에서 얼굴에 화살을 맞았다. 『신쵸코키(信長公記)』 수권(首巻)은 그가 우안(右眼) 아래에 화살을 맞은 채로 적을 쓰러뜨렸다고 기록한다.9

전승에 따르면 그는 아군이 퇴각을 권유했음에도 “아직 수급을 하나도 얻지 못했다”며 화살이 얼굴에 꽂힌 채로 적진에 돌입, 자신을 쏜 미야이 본인을 벤 뒤 수급을 확보했다. 전투 후 수실검(首実検)에도 화살을 뽑지 않은 채 참석했다고 한다. 이 부상 이후 한쪽 눈이 실명했다는 설도 있으나, 현존하는 초상화 등에서는 양안이 그려져 있어 단정하기 어렵다.10

2-3. 카부키모노의 외양

이 시기 도시이에는 카부키모노(傾奇者)였다. 카부키모노는 화려하고 파격적인 복장·행동으로 과시하는 무사를 가리키는 말로, 당대 노부나가 본인이 대표적 카부키모노로 꼽혔다.

『산츠보키(三壺記)』와 『리케코 오요와(利家公御夜話)』에 따르면, 청년 도시이에는 키 6척(약 182센티미터)에 이르는 당대 기준 압도적 장신이었다. 남성 평균 신장이 157센티미터 전후이던 시절의 182센티미터는 현대 기준 2미터에 가까운 위압감이었다. 복장도 파격적이어서 여물(女物, 온나모노) 기모노를 걸치거나 짐승 털을 덧댄 화려한 옷을 입고, 허리에는 붉은 칼집의 태도(赤鞘の太刀, 아카자야노타치), 손에는 주칠 장창을 들고 거리를 누볐다. 길에서 그가 지나가면 사람들이 “마타자에몬노야리가 키타조(又左衛門の槍が来たぞ, 마타자에몬의 창이 온다)“라 외치며 길을 피했다고 한다.11

이 시기 그가 얻은 별명이 창의 마타자(槍の又左, 야리노 마타자)다. 마타자에몬이라는 통칭과 장창 무용을 합친 호칭으로, 평생을 따라다녔다.

2-4. 마츠와의 혼인 (1558)

1558년(에이로쿠 원년), 21세의 도시이에는 12세의 마츠를 정실로 맞이한다. 나이 차는 9세. 마츠는 오와리 오키시마(沖島) 출신으로, 부친 시노하라 카즈에(篠原一計)가 4세경 사망하자 이모의 집, 즉 마에다 가문에 들어와 함께 자랐다. 즉 두 사람은 같은 지붕 아래에서 성장한 외사촌 남매였다가 부부가 된 경우다.12

혼인 중매자는 네네(ねね, 후일의 코다이인)로 전해진다. 도시이에와 네네의 남편 키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郎, 후일의 히데요시)는 기요스 시절 이웃에 살던 동료였다. 이 이웃 관계가 평생 히데요시-도시이에의 개인적 유대의 출발점이 된다.


3. 주아미 참살과 파문 (1559~1561)

도시이에 생애 첫 번째 큰 변곡점이다. 본 절의 상세 경위는 별도 포스트에서 다루며, 여기서는 필러 전체의 흐름에 필요한 만큼만 기술한다.

3-1. 코가이기리 사건 (1559)

노부나가의 동몽중(同朋衆) 가운데 주아미(拾阿弥, 주아미)라는 이름의 다도 승이 있었다. 동몽중은 주군의 측근에서 예능·다도·잡무를 담당하는 종교적 직종으로, 주군의 총애를 배경으로 무장들에게 무례를 범하기도 했다. 주아미는 특히 노부나가의 편애를 믿고 가신들에게 횡포를 부렸다고 전한다.

사건의 발단은 코가이(笄, 고가이)였다. 코가이는 칼집에 부속된 머리빗 겸 장식구로, 도시이에의 코가이는 정실 마츠의 아버지 시노하라 카즈에의 유품을 아내가 그에게 넘겨준 것이었다. 이를 주아미가 훔쳤다. 노부나가의 1차 중재와 사사 나리마사(佐々成政)의 중재로 일시 진정되었으나, 주아미는 반성 없이 오히려 도시이에를 비아냥거렸다.

1559년(에이로쿠 2년), 도시이에는 노부나가의 면전에서 주아미를 베었다. 이 사건을 후대에 “코가이기리(笄斬り)“라 부른다.13

3-2. 출사정지 처분

격노한 노부나가는 당초 사죄(死罪)를 고려했으나, 시바타 카츠이에와 모리 요시나리(森可成)의 중재로 출사정지(出仕停止)로 감형했다. 출사정지는 가신 신분을 박탈하고 오다 가문에서 추방하는 처분으로, 현대 한국어 문헌에서 “파문(勘当)“으로 번역되는 경우가 많으나 엄밀히는 가족 권리까지 박탈하는 파문이 아니라 주종 관계의 정지에 가깝다.

기간은 약 2년. 이 동안 도시이에는 아츠타(熱田) 신궁의 사가(社家)인 마츠오카가(松岡家)의 비호를 받았다고 전한다.14

3-3. 오케하자마와 모리베 — 무단 참전과 복귀

1560년 5월 오케하자마 전투(桶狭間の戦い). 도시이에는 출사정지 상태였으나 무단으로 참전하여 『신쵸코키』 수권에 따르면 “아사(朝) 전투에서 수급 하나, 오후 총붕괴(惣崩れ) 때 수급 둘, 합계 세 개”를 헌상했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여전히 그를 부르지 않았다(“召し出だされ候はず”).15

같은 해 7월 부친 토시마사가 사망하고, 가독은 장형 토시히사가 잇는다.

1561년 5월 14일 모리베 전투(森部の戦い). 노부나가의 미노 사이토씨 정벌 초기 전투로, 도시이에는 재차 무단 참전한다. 여기서 사이토 측 호걸 아다치 로쿠베에(足立六兵衛, 별명 “쿠비토리 아다치(首取足立)“)를 포함해 수급 둘을 확보하는 공을 세웠다. 『신쵸코키』 수권 제41화는 이 전투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此の度、前田又左衛門御赦免なり(고노 타비, 마에다 마타자에몬 고샤멘나리)” — 이번에 마에다 마타자에몬은 사면되었다.

300관의 가증과 함께 총 450관문(貫文)의 영지로 귀참(帰参)이 허가되었다.16

후일 도시이에는 이 파문 시기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몰락했을 때 평소 친하던 사람도 말 한마디 건네지 않는다. 그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벗이다.” 파문 기간 중 중재에 나선 시바타·모리, 오랜 이웃 히데요시, 후일 가신이 되는 형 야스카츠와의 유대가 이 시기에 형성되었고, 이것이 그의 인격적 기반이 된다.17

3-4. 아라코 가독 상속 (1569)

1569년(에이로쿠 12년) 10월, 장형 토시히사에게 실자(實子)가 없고 병약하다는 이유로 노부나가가 직접 가독 상속을 명령한다. 토시히사는 다키가와 가즈마스(滝川一益)의 인척인 케이지로(慶次郎, 후일의 마에다 토시마스·前田慶次)를 양자로 맞아 가문을 잇게 하려던 참이었으나, 노부나가는 장자 상속 원칙을 뒤집고 토시이에에게 상속을 명했다.

이는 극히 이례적인 인사 개입이다. 가문 내부 질서가 아닌 주군의 일방적 명령으로 장자 상속을 뒤엎는 일은 당대에도 드물었다. 노부나가가 도시이에의 무도(武道) 역량을 얼마나 높이 평가했는지를 보여주는 직접적 증거로 읽힌다.18

이 시점의 영지는 아라코 2,000관. 토시히사는 출가하여 “쿠란도뉴도(蔵人入道)“로 칭했고, 훗날 오히려 동생 도시이에의 가신이 된다.

이 사건의 상세 경위와 주아미 인물상, 파문 기간의 행적은 별도 포스트에서 다룬다.


4. 아카호로슈 필두 — 노부나가의 친위대 (1567~1574)

4-1. 아카호로슈(赤母衣衆) 편성

1567년경, 노부나가는 마와리(馬廻)·소성슈(小姓衆) 가운데 무공이 탁월한 엘리트를 선발하여 호로슈(母衣衆)를 편성한다. 호로(母衣)는 등 뒤에 두르는 천으로 된 장식품으로, 풍압을 받아 부풀어 오르면 화살 방어·피아 식별·전장 사기 효과를 냈다. 노부나가는 이를 적(赤)과 흑(黒)의 두 조직으로 나누어 각 10명 전후의 엘리트를 배치했다.19

  • 아카호로슈(赤母衣衆, 적모의중) 필두: 마에다 도시이에
  • 구로호로슈(黒母衣衆, 흑모의중) 필두: 사사 나리마사

아카호로슈의 구성원에는 모리 신스케(毛利新介, 수명 요시카츠(良勝) — 오케하자마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수급을 취한 인물), 카나모리 나가치카(金森長近, 후일 히다 다이묘), 이와무로 나가토노카미(岩室長門守), 사와키 요시유키(佐脇良之, 도시이에의 동생), 후쿠즈미 히데카츠(福富秀勝) 등이 포함되었다.20

4-2. 적·흑 두 필두의 위상

흑과 적의 격차는 미묘하다. 『스가 토시이에쿄 고와(菅利家卿語話)』에 따르면 도다 카츠시게(戸田勝成)가 이렇게 언급한 바 있다.

“赤母衣衆は、少し人の覚えも薄き様に申候(아카호로슈와, 스코시 히토노 오보에모 우스키요니 모우시소로)” — 아카호로슈는 사람들의 기억에 조금 희미한 편이다.

세평에서는 흑이 한 수 위로 여겨졌다고 한다. 다만 이는 명예적 차이일 뿐 실질 직무상으로는 대등했다. 소성 출신이 적, 마와리 출신이 흑으로 배속되는 경향이 있었다. 두 필두 도시이에와 나리마사는 이후 20여 년에 걸친 경쟁 관계를 이어가며, 서로의 이력이 전국시대 후반 북륙 정치사의 축을 이룬다.21

노부나가 호로슈 이원 편성도 — 아카호로슈(적모의중)와 구로호로슈(흑모의중) 織田信長 오다 노부나가 赤母衣衆 黒母衣衆 前田利家 마에다 도시이에 — 필두 구성원 毛利良勝 (모리 요시카츠) 金森長近 (카나모리 나가치카) 岩室長門守 (이와무로 나가토노카미) 佐脇良之 (사와키 요시유키) 福富秀勝 (후쿠즈미 히데카츠) 출신 경향: 小姓 (소성) 출신 佐々成政 사사 나리마사 — 필두 구성원 生駒勝介 (이코마 카츠스케) 毛利秀頼 (모리 히데요리) 津田盛月 (츠다 모리츠키) 塚本小大膳 (츠카모토 코다이젠) 출신 경향: 馬廻 (마와리) 출신 시즈가타케·엣추로 이어지는 대립 축 * 세평에서는 흑이 한 수 위로 여겨졌으나 실질 직무는 대등

노부나가 친위대 이원 구조. 두 필두 도시이에와 나리마사는 이후 20여 년에 걸친 경쟁 관계를 이어가며 북륙 정치사의 축을 이룬다.

4-3. 이 시기의 전투 참여

1570년(겐키 원년) 4월 카네가사키 퇴각전(金ヶ崎の退き口)에서 노부나가 본진 경호, 같은 해 6월 아네가와 전투(姉川の戦い)에서 아사이 측 인물을 토벌, 1573년 이치조다니 전투(一乗谷の戦い)에서 아사쿠라씨 멸망전에 참전하는 등 노부나가 주력 방면군의 일원으로 각 전선에 투입된다.22

아카호로슈 시스템 전반과 두 필두의 경쟁 구도는 별도 포스트에서 다룬다.


5. 부중 3인중에서 능등 영주로 (1575~1581)

5-1. 에치젠 일향일규 평정과 코마루성 출토 문자와

1575년(덴쇼 3년) 8월, 노부나가는 에치젠(越前)의 잇코잇키(一向一揆)를 대규모로 평정한다. 도시이에는 이 작전에 종군했다. 1576년 5월의 2차 평정 과정에서 도시이에가 담당한 진압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1차 물증이 존재한다.

1932년 에치젠 코마루성(小丸城) 터에서 출토된 문자와(文字瓦)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새겨져 있다.

“五月廿四日 いきおこり、其まゝ前田又左衛門尉殿、いき千人ばかりいけとりさせられ候也、御せいはいははっつけ釜にいられあぶられ候哉” — 5월 24일 잇코잇키가 봉기하자, 마에다 마타자에몬노죠 님이 그대로 잇키 약 1천 명을 생포하게 하고, 처형은 책형(磔, 하리츠케)과 가마구이(釜煎り, 카마이리)로 구워지게 하셨던가.

현재 에치젠시 코시노사토 만요칸(越前の里・万葉館) 소장이다. 기와에 기와장이가 새긴 사적 기록으로, 사료적 신뢰도가 매우 높은 1차 물증에 해당한다.23 잇코잇키 탄압기 도시이에의 무자비한 지휘관으로서의 측면을 보여준다.

5-2. 부중 3인중 (府中三人衆)

1575년 9월 23일, 에치젠 평정의 결과 영지 재분배가 이루어진다. 8군(郡)은 시바타 카츠이에에게 주어졌고(기타노쇼·北ノ庄), 이마타테(今立)·난죠(南条) 2군 약 10만 석은 3명의 가신에게 각 3만 3천 석씩 분봉된다. 이 3명이 부중 3인중(府中三人衆)이다.

  • 후와 미츠하루(不破光治) — 류몬지성(龍門寺城)
  • 사사 나리마사 — 코마루성(小丸城)
  • 마에다 도시이에 — 부중성(府中城)

3인의 성격은 표면상 카츠이에의 메츠케(目付, 감시역)였다. 노부나가가 카츠이에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 직속 부하 3명을 배치한 것이다. 그러나 북륙 전선이 격화되면서 실질적으로는 요리키(与力, 지휘 하 동료)로 전환되어 카츠이에 휘하에서 일치된 작전을 수행하게 된다.24

도시이에의 신분 변화는 이 시점에 결정적이다. 2,000관(약 4~5천 석)의 토호에서 3만 3천 석 규모의 중견 영주로 올라선 것이다.

5-3. 나가시노와 테도리강

1575년 5월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에서 도시이에는 사사 나리마사·노노무라 마사나리(野々村正成)·후쿠즈미 히데카츠·반 나오마사(塙直政)와 함께 철포봉행(鉄砲奉行)에 임명되었다. 노부나가의 삼단 철포대 운용을 지휘하는 실무 책임자의 한 사람이었다는 뜻이다.25

1577년(덴쇼 5년) 9월 23일, 카츠이에 총대장 하에 북륙 방면군이 엣추로 진격하다가 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의 대군에 추격당해 테도리강 전투(手取川の戦い)에서 대패한다. 『신쵸코키』에는 이 본전의 기술이 없으며, 켄신 측 서장(書状)에 의존해 규모와 손해를 재구성하는 상황이다. 패군의 규모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당시 노부나가 방면군이 맞이한 가장 큰 패전 중 하나였다.26

5-4. 능등 23만 석 — 국지 다이묘 진입 (1581)

1581년(덴쇼 9년) 2월 28일 교토에서 열린 오우마조로에(御馬揃え, 노부나가 주최 군사 열병식)에 도시이에는 에치젠슈(越前衆)를 이끌고 상경한다. 같은 해 3월, 노부나가는 스가야 나가요리(菅谷長頼)와 함께 도시이에에게 능등 통치를 명했고, 8월 17일 능등 일국 약 23만 석을 정식 수여받아 나나오성(七尾城)에 입성한다.

영지가 아라코 2,000관 → 에치젠 부중 3만 3천 석 → 능등 23만 석으로 급증했다. 약 7배의 증가다. 이로써 도시이에는 국지 다이묘(一国持ち大名, 잇코쿠모치 다이묘)의 반열에 오른다. 국지 다이묘는 한 국(国) 전체를 영유하는 다이묘를 가리키며, 노부나가 가신단 내 최고 수준의 위상이었다.27

1582년경 도시이에는 험준한 산성인 나나오성을 폐성하고, 항구에 가까운 코마루야마성(小丸山城)을 축성해 능등 통치의 새로운 거점으로 삼는다. 정치·경제 중심을 항구 부근으로 이동시키는 전형적 근세 다이묘의 판단이었다.



6. 혼노지의 변과 시즈가타케의 선택 (1582~1583)

도시이에 생애 두 번째 큰 변곡점이다. 주군 노부나가의 급사와, 한 세대 선배 카츠이에에 대한 배신에 가까운 전향. 이 1년 남짓한 시간 동안의 선택이 그의 나머지 생애 전부를 결정한다.

6-1. 우오즈성 공성 중의 혼노지 (1582년 6월)

1582년(덴쇼 10년) 3월, 카츠이에를 총대장으로 한 북륙 방면군 — 카츠이에·사사 나리마사·도시이에·사쿠마 모리마사(佐久間盛政) — 이 엣추 우오즈성(魚津城)을 포위한다. 약 4만의 오다군에 맞서 우에스기 측 수비군은 약 3,800명. 장기 공성전이었다.

6월 1일, 도시이에는 형 야스카츠에게 대포 수리를 의뢰해 완료한다. 이는 북륙 전선에서 최초로 확인되는 대포 사용 사례다. 다만 불량품이었는지 전술적 효과는 크지 않았다.28

같은 날 새벽, 교토에서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이 일어났다. 노부나가는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의 기습으로 자해했다. 도시이에를 비롯한 북륙군은 이 소식을 즉시 알지 못했다.

6월 3일, 우오즈성이 낙성하고 성장(城将) 13명이 자해한다. 유명한 일화로, 이들이 자해 직전 자신들의 귀에 구멍을 뚫어 이름 패(木札)를 꿰어 매달았다고 전한다. 수급이 엉켜도 신원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한 처치였다.

6월 6일 밤, 시바타군은 노부나가 사망 소식을 접하고 전면 철수를 결정, 기타노쇼성으로 후퇴한다. 도시이에 역시 능등으로 귀환한다.

6-2. 이시도야마 전투 (1582년 6월 26일)

도시이에가 능등으로 돌아온 직후, 구 하타케야마(畠山) 잔당 누쿠이(温井)·미야케(三宅) 등이 주도한 잇키가 일어난다. 이시도야마(石動山) 일대의 사찰 세력이 주축이었다. 도시이에는 이 잇키를 철저히 진압했다. 승려와 아이까지 난도질(撫で切り)했다고 전하며, 수급 1,060급을 산문(山門)에 내걸었다. 능등 지배를 흔드는 어떤 세력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공포 통치의 선언이었다.29

6-3. 청주회의 불참 (1582년 6월 27일)

혼노지의 변으로부터 25일 후, 노부나가 사후 처리를 위한 청주회의(清洲会議, 키요스카이기)가 4명 체제로 열린다. 시바타 카츠이에·하시바 히데요시·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이케다 츠네오키(池田恒興). 도시이에는 참석 자격이 없었고, 북륙 전선 마무리 때문에 물리적으로도 참석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회의에서 노부나가의 후계는 장남 노부타다(信忠)의 적자인 삼호시(三法師, 당시 3세)로 결정되었다. 히데요시가 주도한 결정이었다. 이때부터 시바타 카츠이에와 히데요시의 권력 경쟁이 본격화된다. 도시이에는 정통성과 의리로 보면 카츠이에 측이었으나, 이웃·동료로서의 개인적 유대는 히데요시 쪽이 두터웠다. 양쪽 모두를 저버릴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30

6-4. 시즈가타케 전투 — 전장 이탈 (1583년 4월)

1583년(덴쇼 11년) 봄, 카츠이에는 히데요시의 확장에 맞서 출진한다. 도시이에도 약 5,000~8,000명을 이끌고 카츠이에 휘하로 합류, 모야마(茂山)에 포진했다.

4월 20일, 카츠이에 진영의 사쿠마 모리마사가 히데요시 측 오이와야마 성채(大岩山砦)를 기습, 나카가와 키요히데(中川清秀)를 전사시켰다. 초기에는 시바타 측이 우세했다.

같은 날 저녁, 히데요시가 미노 오가키에서 기노모토까지 약 52킬로미터를 5시간 만에 강행군, 이른바 “미노 오오가에시(美濃大返し)“로 본군을 복귀시킨다. 다음 날인 4월 21일 오전, 히데요시 본군이 모리마사 부대를 총공격한다.

전투가 한창이던 중, 모야마에 포진하고 있던 도시이에 부대가 돌연 전선에서 이탈한다. 철수하는 모양새로 전장을 벗어났다. 이것이 시바타군의 “우라쿠즈레(裏崩れ, 내부 붕괴)“를 불렀다. 정오 무렵 모리마사 부대는 궤멸했고, 모리마사의 동생 모리마사(勝政)가 전사했다. 카츠이에 본군은 기타노쇼성으로 패주한다.31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 포진도 — 余呉湖 남북 대치 1583년 4월 21일 — 전투 당일 포진 余呉湖 요고코 北国街道 호쿠코쿠 가이도 北ノ庄城 기타노쇼성 시바타 本城 府中城 후추성 이탈 후 귀환 柴田勝家 시바타 카츠이에 柳ヶ瀬 · 야나가세 柴田勝豊 시바타 카츠토요 不破勝光 후와 카츠미츠 拝郷家嘉 하이고 이에요시 佐久間盛政 사쿠마 모리마사 前田利家 마에다 도시이에 茂山 · 모야마 羽柴秀吉 하시바 히데요시 木之本 · 기노모토 田上山砦 다노우에야마 羽柴秀長 하시바 히데나가 大岩山砦 ★ 오오이와야마 中川清秀 나카가와 키요히데 전사 岩崎山砦 이와사키야마 高山右近 다카야마 우콘 賤ヶ岳砦 시즈가타케 桑山重晴 쿠와야마 시게하루 佐久間 大岩山 기습 裏崩れ 美濃大返し 오가키→기노모토 52㎞ 범례 시바타군 시바타 진형선 前田 (이탈) 하시바 요새 하시바 방어선 산지 성곽 美濃大返し 이탈·붕괴

1583년 4월 21일 시즈가타케 전투. 余呉湖 북쪽에 시바타군, 남쪽 산지에 하시바 요새선이 배치됐다. 佐久間盛政의 大岩山 기습 → 前田利家 이탈(裏崩れ) → 美濃大返し(히데요시 급귀환)으로 전세가 역전됐다.

6-5. 이탈의 해석 — 사료와 학계 평가

도시이에의 전장 이탈이 사전 내통인지, 전장에서의 현실적 판단인지는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이었다.

사전 내통설의 근거는 전후 처우다. 전투 직후 가가 2군(河北·石川)을 가증받았다는 사실이 지목된다. 같은 카츠이에 진영에서 항복한 카나모리 나가치카 등은 가증 없이 현상 유지에 그쳤다.

현실 판단설의 근거는 후추성(府中城)에서의 실제 전투다. 이탈 후 도시이에가 후추성으로 복귀했을 때 실제로 총격전이 벌어졌고, 도시이에의 유력 가신 요코야마 나가타카(横山長隆)가 전군(殿軍, 후군 엄호)으로 전사했다. 완전한 시나리오대로라면 이런 손실은 나오지 않는다.

근년 학계는 대체로 “완전한 짜맞춘 각본은 아니지만, 시바타 진영 패배의 직접적 원인이 도시이에 부대의 이탈이었다”는 평가로 수렴한다.32 전전 세대 다카야나기 미츠토시(高柳光寿)는 “이것이 시바타 측 최대의 패인”이라고 직설적으로 평했다.

6-6. 후추성의 유즈케 일화

이탈 후 도시이에는 후추성으로 복귀한다. 패주하던 카츠이에가 후추성에 들러 유즈케(湯漬, 뜨거운 물에 만 밥)와 갈아탈 말을 청했고, “도시이에는 마에다 가문을 위해 히데요시에게 붙으라”며 스스로 맹약을 풀어주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인질로 잡혀 있던 도시이에의 3녀(마아히메, 麻阿姫)도 이때 되돌려 보냈다고 한다.33

이 일화의 주요 전거는 『시즈가타케 갓센키(賤岳合戦記)』와 『카와스미 타이코키(川角太閤記)』 등 에도기 편찬 사료다. 특히 『카와스미 타이코키』와 오제 호안(小瀬甫庵)의 『타이코키(太閤記)』는 마에다 가문의 어용 편찬 계통에 속해 도시이에의 “배신” 이미지를 완화하는 서사적 기능을 수행한다는 지적이 있다. 실제로 다음 날 히데요시군이 후추성 앞을 지날 때 후추성에서 철포전이 발생했고, 호리 히데마사(堀秀政)의 설득을 거쳐 항복했다. 완전한 무혈 귀순은 아니었다.34

6-7. 기타노쇼성과 오이치 (1583년 4월 23~24일)

4월 23일, 히데요시군이 기타노쇼성(北ノ庄城)을 포위한다. 도시이에가 선봉을 맡았다. 한때 자신의 상관이었던 카츠이에의 본성을 공격하는 역할이다. 4월 24일, 카츠이에와 오이치노카타(お市の方, 노부나가의 여동생)가 자해한다. 오이치의 세 딸 차차(茶々)·하츠(初)·고(江)만 구출되어 훗날 도요토미·교고쿠·도쿠가와 세 가문의 정실 내지 측실이 된다.

4월 28일, 사사 나리마사가 일시 점거하고 있던 가나자와성(金沢城)이 포위되었고, 나리마사는 삭발(剃髪) 항복으로 엣추 일국만 보전한다. 도시이에는 가나자와성에 입성한다.35

6-8. 전후 포상 — 가가 100만석의 기반

시즈가타케 직후 도시이에가 받은 포상은 다음과 같다.

  • 능등 23만 석 본령 안도(安堵)
  • 가가 2군(河北·石川) 가증 (구 사쿠마 모리마사 영지)

거성은 코마루야마에서 가나자와성으로 이전한다. 이것이 “가가 100만석”의 물리적 기반이다. 석고로는 약 40~50만 석 수준이었으나, 지리적으로 가가·능등 두 국의 핵심부를 장악한 셈이 되었다.36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도시이에의 선택을 둘러싼 사료별 해석과 학계 평가는 별도 포스트에서 다룬다.


7. 가가 백만석의 기반 — 히데요시 정권 중진 (1584~1590)

7-1. 스에모리성 전투 (1584년 9월)

시즈가타케 이듬해,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 전역이 동쪽에서 전개되던 중, 북륙에서도 사태가 벌어진다. 구 부중 3인중의 동료 사사 나리마사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진영으로 돌아서, 엣추 도야마에서 도시이에를 공격한 것이다.

1584년 9월 9일, 나리마사가 약 1만 5천 명을 이끌고 가가·능등 국경의 스에모리성(末森城)을 포위한다. 수비군은 300~500명에 불과했고, 성장 오쿠무라 나가토미(奥村永福)가 사수했다. 삼의환·이의환이 함락되고 본환만 남은 상태였다.

전승은 드라마틱하다. 마츠가 금은 자루를 던지며 “금은에 창을 들려 파병하라”고 도시이에를 질타했고, 격노한 도시이에가 즉시 출진을 결심했다고 전한다. 이 일화들은 에도기 각색의 가능성이 높다.37

9월 11일 새벽, 도시이에는 2,500명으로 해안을 우회 기습해 나리마사군을 격퇴한다. 가가 100만석의 기반을 최종 보전한 전투로, 후대 “마에다 가문의 오케하자마”로 불리게 된다.

7-2. 엣추 평정 — 사사 나리마사 정벌 (1585)

1585년(덴쇼 13년) 8월, 히데요시가 10만 대군을 이끌고 엣추로 진격한다(富山의 役). 총대장은 오다 노부오(織田信雄)였으나 실질 지휘는 히데요시였다.

8월 26일경, 사사 나리마사가 삭발 항복한다. 엣추 일국 가운데 신카와군(新川郡) 하나만 영지로 안도받고, 도나미·이미즈·네이 3군은 도시이에의 장남 마에다 토시나가(前田利長)에게 가증된다.

이로써 마에다 일족은 약 76만 5천 석에 도달한다. 가가 100만석의 9할에 해당하는 규모다.38

7-3. 관위 상승 — 가가 다이나곤(大納言)

히데요시 정권 하에서 도시이에의 관위는 빠르게 상승한다.

연도관직
1586년하시바(羽柴)성 허용, 치쿠젠노카미 사콘노에곤노쇼쇼(筑前守·左近衛権少将)
1588년도요토미(豊臣)성 하사
1590년 1월산기(参議)
1594년 1월종3위(従三位)
1594년 4월권중납언(権中納言)
1596년종2위 권대납언(従二位 権大納言) — 통칭 “가가 다이나곤(加賀大納言)”

1596년의 종2위 권대납언은 도요토미 정권 내 다이묘 가운데 이에야스(정2위 내대신) 다음 가는 최고위였다. 도시이에가 도요토미 정권 말기 히데요시의 가장 신뢰받는 다이묘 중 한 명이었음을 공식 관위가 증명한다.39

7-4. 오다와라 정벌 (1590)

1590년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에서 도시이에는 호쿠고쿠제이(北国勢, 북륙군) 총지휘를 맡았다. 우에스기 카게카츠·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와 함께 고즈케(上野)로 진입, 호조씨 북단의 요충 마츠이다성(松井田城)을 공략한 뒤 무사시(武蔵)로 진격해 하치가타성(鉢形城)·하치오지성(八王子城)을 떨어뜨렸다.

오다와라 낙성 후에도 도시이에는 오슈(奥羽)에 잔류해 진압에 종사했고,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에 대한 심문, 남부 노부나오(南部信直)와의 교섭 등 외교 실무도 맡았다. 이 시기 도시이에는 히데요시 정권 북부 방면의 실질적 대리인 역할을 수행했다.40

7-5. 조선 출병 시기 (1592~1598)

1592년 임진왜란(文禄の役) 개전 이후, 도시이에는 히젠 나고야(肥前名護屋) 본영에 주둔했다. 동원 병력은 약 8,000명. 다만 그는 직접 조선으로 건너가지는 않았다. 히데요시 본영 경호와 후방 보급의 책임자였다.

중요한 것은 히데요시의 직접 도해(渡海) 시도를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함께 간지(諫止)했다는 사실이다. 1592년 한반도 전선이 확대되자 히데요시는 본인이 직접 조선으로 건너가겠다고 선언했고, 이를 가장 강하게 만류한 것이 도시이에와 이에야스였다. 이에야스가 부재할 때는 도시이에가 나고야 본영의 실무 지휘를 맡았다.41


8. 오대로와 임종 — 도쿠가와 견제자의 최후 (1598~1599)

도시이에 생애 세 번째 변곡점이다. 그의 마지막 1년은 거의 이에야스와의 정치적 대치로 채워진다.

8-1. 오대로 체제 (1598)

1598년(케이쵸 3년) 히데요시가 임종을 앞두고 오대로(五大老) 체제를 제도화한다. 다섯 명의 유력 다이묘가 히데요리를 보좌하는 구도다.

오대로영지 규모관위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약 255만 석정2위 내대신
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약 83만여 석종2위 권대납언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약 120만 석종3위 권중납언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약 120만 석종3위 권중납언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약 57만 석종3위 권중납언

도시이에의 석고는 이에야스의 3분의 1 수준이었지만, 관위는 이에야스 다음이었고, 무엇보다 히데요시의 유명(遺命)으로 히데요리의 후야쿠(傅役, 후견·양육 책임자)를 맡았다. 정권 구조는 이에야스가 후시미성(伏見城)에서 정무를 총괄하고, 도시이에가 오사카성(大坂城)에서 어린 히데요리를 지키는 이원 체제였다.42

8-2. 사적 혼인 위반 탄핵 (1599년 1월)

1599년(케이쵸 4년) 1월, 이에야스가 다테 마사무네·하치스카(蜂須賀)·후쿠시마(福島) 등과 무단 사적 혼약을 맺는다. 이는 히데요시의 유언에서 명시적으로 금지한 사항이었다. 도시이에와 4대로(이에야스 제외), 5봉행이 연명으로 힐문했다. 이에야스는 일시 양보하는 모양새를 취하며 기청문(起請文) 교환으로 표면 화해했고, 무코지마성(向島城)으로 이거한다.43

8-3. 이에야스의 병문안과 “이불 밑의 칼” (1599년 3월 11일)

1599년 3월 11일, 이에야스가 오사카의 마에다 저택으로 병중의 도시이에를 문병했다. 다이묘 간 문병은 정치적 제스처이면서 동시에 물리적 위험을 동반하는 행위였다.

이 자리에서 도시이에가 이불 밑에 칼을 감추고 이에야스를 맞이했다는 일화가 여러 사료에 전한다. 『아사카와 키키가키(浅川聞書)』, 『도다이키(当代記)』, 『후쵸 요로쿠(譜牒余録)』 등이 전거다.44 두 원로의 대면은 무사히 끝났지만, 그 긴장감만큼은 전승이 과장하지 않은 실감이었다.

이 시점에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정권 전복을 자제하고 있었던 이유는 명확하다. 도시이에의 종2위 권대납언이라는 관위와 히데요리 후견이라는 상징성, 그리고 3대로·5봉행은 물론 가토 기요마사·호소카와 다다오키 같은 무단파까지 도시이에의 판단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시이에가 살아 있는 동안 이에야스는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45

8-4. 임종과 유언 (1599년 윤3월 3일)

케이쵸 4년 윤3월 3일(양력 1599년 4월 27일), 도시이에는 오사카 저택에서 향년 62세로 병사한다. 법명 高徳院殿桃雲浄見大居士(고토쿠인덴 토운죠켄 다이코지).

유언은 “3년간 가가로 돌아가지 말고 히데요리를 지켜라”였다. 『리케코 오요와(利家公夜話)』에 기록된 이 유언은 장남 토시나가에게 향한 것이다. 도시이에의 마음속에서 주군은 여전히 노부나가였다.46

8-5. 같은 날 저녁 — 七將 사건

도시이에의 사망 당일 저녁, 무단파 7장(七将)이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의 오사카 저택을 습격하려는 사건이 일어난다. 구성원은 가토 기요마사·후쿠시마 마사노리·구로다 나가마사·호소카와 다다오키·이케다 데루마사·아사노 요시나가·하치스카 이에마사 7명이다.

미츠나리는 사타케 요시노부(佐竹義宣)의 도움으로 후시미성 치부쇼마루로 피신했다. 윤3월 10일, 이에야스의 차남 유키 히데야스(結城秀康)의 호송으로 미츠나리는 사와야마성(佐和山城)에 은거한다.

윤3월 13일, 이에야스가 후시미성 본환(本丸)에 입성한다. 『다몬인 일기(多聞院日記)』는 이 사태를 간결하게 기록한다.

“家康が伏見の本丸へ入られ、天下殿に成られた” — 이에야스가 후시미 본환에 입성하여 천하의 주인(天下殿)이 되었다.

도시이에의 사망으로부터 10일이 걸렸다. 이 10일 동안 도요토미 정권의 권력 균형은 이에야스 일방 쪽으로 완전히 기울었다. 세키가하라(関ヶ原)까지는 이후 1년 반이 남아 있었다.47

七将 사건은 근년 학계에서 “무장 습격”이 아닌 “소송·실각 압박 소동”이었다는 재평가(笠谷和比古·白峰旬·水野伍貴)도 제기된다.48


9. 전장에서의 모습, 인간 도시이에

9-1. 창과 갑주

창의 마타자의 주칠 3간반(朱塗 三間半) 장창은 현존품이 남아 있지 않다. 후대 기록상 등장할 뿐이다. 다른 소문이 있는 창으로 키쿠치 창(菊池槍, 키쿠치야리)이 있다. 이는 히고(肥後) 키쿠치씨 계열의 창 양식으로, 우노쿠비즈쿠리(鵜の首造)라는 특유의 칼날 구조를 갖는다. 도시이에가 키쿠치 창을 애용했다는 전승은 여러 대중서에 등장하나, 현존 실물이 도쿠가와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는 주장은 1차 사료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유보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다.49

갑주는 “金小札白糸素懸縅胴丸具足(킨고자네 시로이토 스가케오도시 도마루구소쿠)“가 유명하다. 스에모리성 전투 때 착용했다는 전승이 있고, 전후 가신 오쿠무라 나가토미에게 하사했다. 현재 마에다 이쿠토쿠카이(前田育徳会) 소장.

흔히 “도시이에=금색 나마즈오 카부토(金鯰尾兜)“의 이미지가 있으나, 이는 장남 토시나가의 은색 나마즈오 카부토(富山市郷土博물관 소장)가 주류설이다. 도시이에 본인이 금색 나마즈오를 썼다는 1차 사료 근거는 약하며, 현대의 오월인형(五月人形) 복제 계열에서 형성된 이미지일 가능성이 높다.50

9-2. 산용 — 주판과 경제 감각

도시이에의 가장 독특한 면모는 숫자에 밝은 무장이었다는 점이다. 파문 시기 2년간의 낭인 생활을 통해 “금이 있으면 세평도 두렵지 않지만, 빈궁하면 세상이 무섭다”는 감각을 몸으로 익혔다고 전한다. 만년에도 가문의 모든 결재를 본인이 직접 수행했고, 애용한 진중 주판(陣中そろばん)이 현재 마에다 손케이카쿠 문고(前田尊経閣文庫)에 보존되어 있다. 히젠 나고야 진중에서 실사용된 물품이다.51

때로 마츠로부터 “인색하다(吝嗇)“고 놀림받기도 했다. 그러나 유언으로 “이쪽에서 상환을 독촉하지 말라. 갚지 못하는 자의 빚은 없었던 일로 하라”고 장남에게 명했다. 인색과 관용이 공존했던 계산된 너그러움이었다.52

9-3. 다도·노·종교

도시이에는 센노 리큐 칠철(千利休七哲)의 한 명으로 꼽힌다. 리큐가 할복을 명령받았을 때 도시이에는 조명(助命) 청원에 나섰으나 성사되지 못했고, 리큐 사후 아들 도안·쇼안의 사면은 이에야스와 도시이에의 탄원으로 성사되었다.53

천하 삼나스(天下三茄子)의 하나인 “후지나스(富士茄子)” 차이레(茶入)는 아시카가→노부나가→히데요시→도시이에 순으로 전해진 명물이다. 이후 마에다 가문 가보로 전승되어 현재 마에다 이쿠토쿠카이 소장.

노(能)는 “3일에 한 번 稽古한다”고 할 정도로 애호했다. 가가번은 대대로 호쇼류(宝生流)를 보호해 “가가 호쇼”라는 말이 생겨났다.

종교적으로는 일련종(日蓮宗)에 귀의했다. 능등 영유 직후인 1581년 묘죠지(妙成寺, 현 이시카와현 하쿠이시)를 무운장구·영내안전의 기원소로 지정했다.

한편 도시이에는 금교령으로 영지를 잃은 기리시탄 다이묘 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을 3만 석 녹으로 초빙하여 가나자와성 대개조를 맡겼다. 종교적 관용이 병존하는 유연한 측면이 있었다.54


10. 사후 — 마츠, 세키가하라, 가가번

10-1. 가가 정벌 위협과 마츠의 에도 인질 (1599~1600)

1599년 9월, 이에야스 암살 계획이 이에야스 측에 고발된다. 이에야스는 이를 빌미로 가가 정벌(加賀征伐)을 시사했다.

토시나가는 가로 요코야마 나가치카(横山長知)를 3차례나 에도에 파견해 변명했다. 사태가 진정되지 않자 마츠가 자진해서 에도 인질이 되겠다고 나섰다. 1600년 5월, 마츠는 가나자와를 떠나 에도로 하향했다.55

마츠의 체류 기간은 14년(~1614년 토시나가 사망 후 귀환). 마츠는 에도 번저에 다이묘 처자가 상주하는 인질제의 제1호가 된다. 이는 에도 막부 참근교대 수반 인질제의 원형을 만든 사건이다.

10-2. 세키가하라와 토시나가 (1600)

1600년 7월, 토시나가는 히가시군(東軍, 이에야스 측)에 가담해 8월 3일 서군의 다이쇼지성(大聖寺城)을 공략한다. 세키가하라 본전(9월 15일)에는 참전하지 않았다.56

전후 포상으로 검지고(検地高) 122만 5천 석 / 주인고(朱印高) 119만 2,760석에 달했다. 이것이 전국 외양 다이묘 중 최대 규모의 탄생이다. 이후 3대 토시츠네 대에 도야마(富山)·다이쇼지(大聖寺) 분번(分藩)을 실시해, 공칭 102만 5천 석 체제가 확립된다. 이것이 후대에 회자되는 “가가 100만석”의 실체다.57

10-3. 토시마사의 개역

차남 마에다 도시마사(前田利政, 1578~1633)는 세키가하라 때 처자가 서군 인질로 잡혀 있었고, 이에야스에 대한 개인적 반감이 강했던 까닭에 재출진을 거부했다. 이에야스는 영지를 개역(改易)했다. 토시마사는 교토 사가노(嵯峨野)에 은거하며 본아미 코에츠(本阿弥光悦)와 교유했다. 오사카의 역(大坂の役)에서도 양 진영 참여를 거부했고, 1633년 교토에서 향년 55세로 사망했다.58

10-4. 가가번 체제와 도시이에의 묘소

가가번의 체제는 다음과 같이 정착한다.

  • 석고: 검지고 122.5만 석 / 주인고 119.3만 석 / 공칭 102.5만 석
  • 가격(家格): 무가 세이가(武家清華) — 도쿠가와 혈연 외 외양 다이묘 중 유일
  • 가신단: 가가 하치케(加賀八家) — 요코야마·마에다 토사노카미·쵸·오쿠무라 카와치노카미·오쿠무라 단고노카미·혼다·무라이·마에다 쓰시마노카미

도시이에의 보리사는 가나자와 호엔지(宝円寺). 묘소는 가나자와 노다야마(野田山) 마에다가 묘지(前田家墓所). 고야산(高野山) 오쿠노인(奥之院)에도 도시이에와 마츠 부부의 보쿄인토(宝篋印塔)가 현존한다.59

마에다 도시이에·마츠 부부와 주요 자녀 가계도 前田利家 마에다 도시이에 1538–1599 혼인 1558년 芳春院まつ 마츠 (호슌인) 1547–1617 前田利長 마에다 토시나가 1562–1614 후사 없음 처: 永姫 (노부나가 4녀) 前田利政 마에다 토시마사 1578–1633 세키가하라 후 개역 처: 蒲生氏郷 딸 前田土佐守家 마츠 혈통 방계 존속 豪姫 고히메 1574–1634 오대로 가문 남편: 宇喜多秀家 麻阿姫 마아히메 1572–1605 公家 입가 남편: 萬里小路充房 자녀 외 정실 소생 자녀: 千世(細川忠隆 처), 菊(前田利直 처) 등 9녀 포함 다수 前田利常 마에다 토시츠나 — 서자 · 3대 번주 1594–1658 처: 珠姫 (이에야스 손녀) — 도쿠가와 편입의 열쇠 서자 3대 加賀藩 102만 5천석 에도 시대 외양 다이묘 최대 석고

11. 가나자와성의 변천 — 100만 석의 상징

도시이에가 1583년 입성한 가나자와성은 이후 마에다 가문 14대에 걸친 거성이 되었다.

연도사건
1488가가 잇코잇키 “百姓のもちたる国” 성립
1546오야마고보(尾山御坊) 창건 — 혼간지 북륙 거점
1580년 4월사쿠마 모리마사가 공략·거성화
1583년 4월 28일도시이에 입성, “오야마성”→ 후일 가나자와성
1587다카야마 우콘이 초빙되어 근세 성곽식 대개조
1592~98토시나가의 본격 개조 — 5중 천수 건립
1599년 윤3월 3일도시이에 사망
1602년 10월 30일낙뢰로 천수 소실 — 이후 재건하지 않음
1631년 4월 14일간에이(寛永) 대화재 → 다츠미 용수(辰巳用水) 정비(1632)
1759년호레키(宝暦) 대화재 — 대부분 소실, 니노마루 중심 재건
1788이시카와몬(石川門) 재건 — 현존, 중요문화재
1881년 1월 10일육군 막사 화재 — 이시카와몬·삼십켄 나가야·쓰루마루 창고 제외 소실
2001히시야구라·하시즈메몬·고주켄 나가야 복원
2010가호쿠몬(河北門) 재건
2020네즈미타몬·네즈미타몬바시 약 140년 만에 복원

가나자와성은 현재 “석축의 박물관(石垣の博物館)“이라 불린다.60


12. 사료와 평가

12-1. 주요 사료 신뢰도

사료편찬 시기성격신뢰도주의점
『신쵸코키(信長公記)』16C말~17C초太田牛一의 동시대 기록★★★★★카야즈·이노우·모리베 공명 최고 신뢰
코마루성 출토 문자와15761차 물증★★★★★잇코잇키 탄압의 직접 증거
『무라이 시게요리 각서』에도 초가신 각서★★★★☆가독 상속·초진
『도다이키(当代記)』에도 초동시대 기록★★★★☆도쿠가와 시점
『간세이쵸슈 쇼카후』1799~1812막부 공식 가보★★★★☆
『카가한 시료(加賀藩史料)』日置謙 1929~번 공식 편년★★★★☆마에다가 현창 편집, 원사료 풍부
『아쇼코 고요와(亜相公御夜話)』에도 전기만년 구술 기록★★★☆☆경제 감각·노부나가 일화의 1차 전거
『산츠보키(三壺記)』에도 중기연대기·전승★★★☆☆세부 오류 있음
『카와스미 타이코키(川角太閤記)』에도 초전기★★★☆☆시즈가타케·스에모리 일화
『타이코키(太閤記)』(小瀬甫庵)1626군기·전기★★☆☆☆마에다가 은고 편향, 시즈가타케 책임 완화
『쇼운코 고코키(松雲公御考記)』츠나노리기마에다가 전기★★★☆☆생년 전거

12-2. 학계 평가

일본:

  • 이와사와 요시히코(岩沢愿彦) 『前田利家』(人物叢書 1966/1988) — 후대 각색을 배제하고 기초 사료 중심으로 재구성한 학술적 대표작. 무용 일변도가 아닌 행정관·외교가·문화인으로 복권시켰다.
  • 오니시 야스마사(大西泰正) 『前田利家·利長 — 創られた「加賀百万石」伝説』(2019) — “가가 100만석 전설”의 후대 창출성을 지적, 도시이에를 “전국 무장에서 영주 다이묘로 변신에 성공한 전형”으로 본다.
  • 다카야나기 미츠토시(高柳光寿) — 시즈가타케 이탈에 대해 “이것이 카츠이에 측 최대의 패인”이라고 직설.

학계 해석은 크게 두 갈래다. (a) 배신설(다카야나기, 스즈키 마사야) 대 (b) 현실적 판단설(이와사와, 오니시). 현대 주류는 후자에 가까우나, 히데요시와의 밀약설도 여전히 유력한 변이다.

한국: 단독 연구는 거의 없다. 임진왜란 연구(노영구·김문자·한명기)에서 “오대로의 한 사람, 도해 예정이었으나 불발” 수준의 언급이 대부분이다.


13. 대중문화

  • NHK 대하드라마 『利家とまつ〜加賀百万石物語〜』(2002) — 가라사와 토시아키·마츠시마 나나코 주연. 평균 시청률 22.1%, 이시카와현 내 40.5%.
  • 가나자와 햐쿠만고쿠 마츠리(百万石まつり) — 매년 6월, 도시이에의 가나자와 입성을 재현하는 행렬 축제.
  • 만화·게임: 『花の慶次』, 『戦国BASARA』, 『戦国無双』, 『仁王2』 등 다수.

14. 한국어권에서 이 인물을 다룰 때 정리해둘 것

이 문서를 정리하며 확인한, 한국어권에 흔히 퍼져 있는 오해·부정확한 서술들이다.

  1. “파문”과 “出仕停止”는 다르다 — 주아미 사건의 처분은 엄밀히는 “출사정지”다. 가족·가독 권리까지 박탈당한 것은 아니다.
  2. “닭과 원숭이” 비유는 근거가 없다 — 도시이에와 히데요시의 관계를 설명할 때 이 표현이 한국어권 블로그·위키에 종종 등장하나, 일본어 사료에 해당 대응은 확인되지 않는다.
  3. 시즈가타케 이탈 = 완전한 내통이었다는 단정은 과하다 — “배신설”과 “현실적 판단설”이 병존하며, 근년 학계는 후자에 무게를 둔다.
  4. “가가 100만석”은 도시이에 생전에 성립하지 않았다 — 100만 석 돌파는 세키가하라 이후 토시나가 대에 이루어진다. 도시이에는 그 기반만 만들었다.
  5. “에도 막부 설립에의 역할”이라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 도시이에는 1599년에 사망했다. 에도 막부 개창(1603)을 보지 못했다.
  6. 菊池槍의 도쿠가와미술관 소장 주장은 유보 필요 — 1차 사료 근거가 확인되지 않는다.
  7. 金鯰尾兜는 토시이에가 아닌 토시나가 소용(銀色)이 주류설이다.

15. 관련 글

이 글은 필러(pillar) 페이지다. 도시이에 생애의 각 장면을 심화 다루는 클러스터 글들을 순차적으로 배포할 예정이다.

  • 주아미 참살과 파문 — 젊은 날의 가장 큰 실수 (클러스터 글, 배포 예정)
  • 시즈가타케의 이탈 — 도시이에는 카츠이에를 배신했나 (클러스터 글, 배포 예정)

16. 참고 문헌

1차 사료 (편년순)

2차 사료·현대 연구

  • 岩沢愿彦, 『前田利家』, 吉川弘文館 人物叢書, 1966 (初版) / 1988 (新装版).
  • 大西泰正, 『前田利家・利長 — 創られた「加賀百万石」伝説』, 平凡社新書, 2019.
  • 見瀬和雄, 『前田利長』, 吉川弘文館, 2018.
  • 宮下和幸, 『前田家: 加賀藩』, 吉川弘文館, 2023.
  • 谷口克広, 『織田信長家臣人名辞典 第2版』, 吉川弘文館, 2010.
  • 笠谷和比古, 『関ヶ原合戦と大坂の陣』, 吉川弘文館, 2007.
  • 日置謙 편, 『加賀藩史料』, 1929~.

박물관·아카이브

  • 前田育徳会 — 마에다가 전래 가보·문서 소장
  • 石川県立歴史博물관 — 도시이에 갑주·관련 문서
  • 金沢城公園·金沢城調査研究所 — 성곽 고고학 연구
  • 高野山 奥之院 — 도시이에·마츠 宝篋印塔
  • 越前市 越前の里 万葉館 — 코마루성 出土 文字瓦

이 글은 사료 중심으로 정리한 필러 페이지다. 각 절의 상세한 전거 해석과 학설 간 충돌은 별도 클러스터 포스트에서 다룬다. 오류·수정 제안은 댓글로 환영한다.

Footnotes

  1. 『松雲公御考記』 (마에다가 전기, 츠나노리 대 편찬) — 생년 1538년설 전거

  2. 『利家記』 — 아라코 영지 관고 2,000관 전거

  3. 『芳春院(마츠) 전기 사료』 — 마에다가와의 외사촌 관계 서술

  4. 沼田頼輔 『日本紋章学』 및 岩沢愿彦, 『石川県史』 — 마에다씨 출자 고증

  5. 前田家 家譜 — 형제 관계 확인

  6. 『加賀藩史稿』 — 犬千代 유명의 유래

  7. 『信長公記』 首巻·『加賀藩史稿』 — 1551년 출사

  8. 『村井重頼覚書』 — 카야즈 초진 “肝に毛が生えておる”

  9. 『信長公記』 首巻 — 이노우 전투 공명

  10. 『利家記』 — 우안 화살 전승, 수실검 참여

  11. 『三壺記』·『利家公御夜話』 — 카부키모노 외양, 신장 6척

  12. 『芳春院』 『加賀藩史料』 — 1558년 혼인

  13. 『信長公記』 首巻·『拾阿弥』 항 — 코가이기리 사건

  14. 『国史大辞典』 “前田利家” 항 — 2년 칩거

  15. 『信長公記』 首巻 — 오케하자마 무단 참전

  16. 『信長公記』 首巻 第41話 — 모리베 사면 “此の度、前田又左衛門御赦免なり”

  17. 『亜相公御夜話』 — 파문기 회고

  18. 『村井重頼覚書』·『前田秀継』 항 — 1569년 가독 상속 직접 개입

  19. 小瀬甫庵 『信長記』 — 호로슈 편성

  20. 『赤母衣衆』·『黒母衣衆』 항 — 구성원 목록

  21. 『菅利家卿語話』 — 적·흑 위상 비교

  22. 『信長公記』 — 카네가사키·아네가와·이치조다니 참전

  23. 小丸城 출토 文字瓦, 에치젠시 越前の里・万葉館 소장 — 1576년 5월 잇키 탄압 1차 물증

  24. 劔神社 千手院恵伝 축사, 天正4년 정월 — “府中三人衆” 당대 호칭 확인

  25. 『信長公記』 — 나가시노 철포봉행

  26. 上杉謙信 書状 — 테도리강 전투 (『信長公記』 본전 기술 없음)

  27. 『加賀藩史料』·『能登国誌』 — 1581년 능등 수여

  28. 『加賀藩史料』 — 우오즈성 대포

  29. 『信長公記』·『能登志徴』 — 이시도야마 전투, 수급 1,060

  30. 『清洲会議』 관련 사료 군 — 4인 체제 및 결정

  31. 『川角太閤記』·『賤岳合戦記』 — 시즈가타케 이탈

  32. 稲本浩弘·渡邊大門 등 근년 연구 — 이탈이 직접 원인

  33. 『川角太閤記』·『賤岳合戦記』 — 후추성 유즈케

  34. 岩沢愿彦 『前田利家』 — 무혈 귀순 아님 지적

  35. 『信長公記』 후기·『太閤記』 — 기타노쇼 공성, 오이치 자해

  36. 『加賀藩史料』 — 전후 포상

  37. 『川角太閤記』·『末森合戦記』 — 스에모리 전투

  38. 『富山の役』 관련 사료 — 1585년 사사 나리마사 삭발 항복

  39. 『公卿補任』·前田家譜 — 관위 변천

  40. 上杉家文書·前田家譜·伊達治家記録 — 오다와라 정벌 北国勢 지휘

  41. 『加賀藩史稿』·『太閤記』 — 임진왜란기 나고야 주둔

  42. 五大老 체제 관련 사료 — 히데요시 유명(遺命)

  43. 『当代記』·『言経卿記』 — 1599년 1월 사적 혼인 탄핵

  44. 『浅川聞書』·『当代記』·『譜牒余録』 — 이불 밑 칼 일화

  45. 笠谷和比古 연구 — 도시이에의 상징적 위상

  46. 『利家夜話』 首書 — 유언 “3년간 히데요리를 지켜라”

  47. 『多聞院日記』 — “家康が伏見の本丸へ入られ、天下殿に成られた”

  48. 笠谷和比古·白峰旬·水野伍貴 — 七将 사건 재평가

  49. 『菊池槍』 관련 사료 — 도쿠가와미술관 소장 주장 유보

  50. 富山市郷土博물관 소장 은색 鯰尾兜 — 토시나가 소용 주류설

  51. 前田尊経閣文庫 소장 陣中そろばん — 히젠 나고야 진중 사용

  52. 『亜相公御夜話』 — 유언 채무 면제

  53. 『利休七哲』 관련 사료 — 다도 계통

  54. 妙成寺 연기(縁起)·『能登志徴』 — 종교 정책

  55. 『加賀藩史料』·『徳川実紀』 — 마츠 에도 하향

  56. 『浅井畷合戦記』 — 1600년 토시나가 세키가하라 대응

  57. 『加賀藩史料』·『大日本近世史料』 — 전후 석고 확정

  58. 『前田土佐守家譜』 — 토시마사 자손

  59. 『野田山墓地誌』·高野山 奥之院 관계 사료 — 묘소

  60. 石川県金沢城調査研究所 보고서 — 가나자와성 석축 편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