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피렌체 전경 — 두오모와 아르노강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는 왜 서로를 혐오했나

1504년 피렌체 거리 —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의 대립

1504년, 피렌체 어딘가의 거리.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걷고 있었다. 귀족 무리가 그에게 다가왔다. 손에는 단테의 『신곡』이 들려 있었다. 구절 하나가 이해가 안 된다며, 설명을 청했다.

바로 그 순간, 미켈란젤로가 근처를 지나쳤다.

레오나르도가 입을 열었다.

“미켈란젤로가 설명해 드릴 것입니다.”

미켈란젤로는 이것이 자신을 망신주려는 함정임을 직감했다. 멈춰 서서, 레오나르도를 향해 쏘아붙였다.

“당신이 설명하시오. 당신은 청동 말 조각을 설계해놓고 주조도 못 하고 수치스럽게 포기한 분 아니오.”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가, 한 번 더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당신이 그걸 해낼 거라 믿은 밀라노 사람들도 참 바보였지.”

레오나르도는 할 말을 잃었다. 얼굴이 붉어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것이 르네상스 최대의 공개 디스전이었다. 그리고 이건 서막에 불과했다.


왜 두 사람은 충돌할 수밖에 없었나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 생애 타임라인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452년생, 미켈란젤로는 1475년생이다. 스물세 살 차이. 나이는 두 사람 사이의 가장 사소한 차이였다.

레오나르도는 사생아였다. 아버지 세르 피에로는 피렌체의 성공한 공증인이었지만, 어머니는 이름조차 기록에 잘 남지 않는 농민 출신 십대 소녀였다. 그 시대 피렌체에서 사생아는 공증인 조합에 가입할 수 없었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제도 밖의 인간으로 출발해야 했다.

미켈란젤로는 달랐다. 피렌체 토스카나의 귀족 가문 출신이라 자처했고, 마틸다 오브 투스카니의 후손이라는 혈통 이야기를 평생 지니고 다녔다. 가문과 혈통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성격도 정반대였다. 레오나르도는 잘 차려입고, 향기를 챙기고, 왕과 귀족들 사이를 유연하게 오가는 우아한 외교관 타입이었다. 수십 개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굴리되 완성하지 못하는 것으로 악명 높았다. 미켈란젤로는 먼지와 물감 가루를 뒤집어쓰고, 옷도 갈아입지 않고, 장화를 신은 채 잠들었다가 피부가 벗겨진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하나에 완전히 몰입하고,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불같은 성격이었다.

두 사람이 같은 도시에 있었다는 것 자체가 사건이었다.


예술관 전쟁 — 파라고네

파라고네 — 회화 vs 조각 논쟁

서로에 대한 반감이 단순한 성격 충돌에 그쳤다면, 이 이야기는 그냥 흘러갔을 것이다. 두 사람의 갈등에는 더 깊은 층이 있었다. 예술 자체에 대한 철학의 충돌이었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에는 ‘파라고네(Paragone)‘라는 논쟁이 있었다. 이탈리아어로 ‘비교’라는 뜻으로, 핵심 질문은 하나였다. 회화와 조각 중 무엇이 더 우월한 예술인가.

레오나르도는 회화 진영의 수장이었다. 그는 『회화론(Treatise on Painting)』에서 조각을 정면으로 저격했다.

“조각은 과학이 아니라 지극히 기계적인 기예다. 조각가는 몸의 피로로 작업을 마치고, 화가는 정신의 피로로 마친다.”

조각은 색채가 없으니 대기 원근법도, 빛과 그림자의 미묘한 표현도 불가능하다. 조각은 외부의 조명에 의존하지만, 화가는 그 빛 자체를 창조한다. 그리고 하나의 문장을 더 남겼다.

“근육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화가는 ‘나무 조각 화가(wooden painter)‘가 된다.”

당시 피렌체의 모든 사람은 이게 누구를 겨냥한 말인지 알았다.

미켈란젤로의 반론은 방향이 달랐다. 그는 파라고네 논쟁에서 어느 편도 명시적으로 들지 않는 대신, ‘디세뇨(disegno)’, 즉 소묘와 설계야말로 회화와 조각 모두의 공통 본질이라 주장했다. 조각의 핵심은 “더하는 것이 아니라 깎아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말을 남겼다.

“신(神)도 흙으로 인간을 빚었다. 신은 조각가였다.”


그란 카발로 — 레오나르도의 가장 아픈 상처

그란 카발로 — 레오나르도의 미완성 기마상

거리 디스전으로 돌아가자. 미켈란젤로가 꺼내든 ‘청동 말’이 왜 그토록 치명적이었는지 이해하려면 배경을 알아야 한다.

1482년, 밀라노 공작 루도비코 일 모로는 레오나르도에게 세계 최대의 기마상 제작을 의뢰했다. 높이 약 7~8미터. ‘그란 카발로(Gran Cavallo)‘라 불리게 될 이 작품은 당대 최대 규모의 청동 기마상이 될 예정이었다.

레오나르도는 16년 이상 매달렸다. 수천 장의 드로잉을 그렸고, 말의 근육과 뼈대를 세밀하게 분석했다. 1493년, 실물 대형 점토 모형을 완성해 공개했다. 찬사가 쏟아졌다.

그리고 1494년. 밀라노 공작은 침략해오는 프랑스군에 맞서야 했다. 대포가 필요했다. 준비해두었던 청동 70톤이 다른 곳에 쓰였다. 주조는 영영 불가능해졌다.

1499년, 프랑스 군대가 밀라노를 점령했다. 병사들은 레오나르도의 점토 모형을 궁수 훈련용 과녁으로 사용해 파괴해버렸다. 16년의 작업이 활쏘기 연습 표적이 되어 사라졌다.

미켈란젤로는 이것을 알고 있었다. 귀족들이 둘러선 공개 석상에서 그것을 끄집어냈다.


팔라초 베키오의 세기 대결

1503~1504년, 피렌체 공화국 서기장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시청 ‘살로네 데이 친퀘첸토(500인의 홀)‘의 양쪽 벽을 두 거장에게 동시에 맡기는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레오나르도의 계약서에는 마키아벨리가 직접 서명했다. 역사상 유일하게 두 사람이 같은 공간에서 동시에 작업하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레오나르도에게 주어진 것은 ‘앙기아리 전투(1440년)’, 피렌체가 밀라노를 이긴 전투였다. 그는 깃발을 빼앗으려는 4명의 기병이 뒤엉키는 장면을 택했다. 전쟁의 폭력성과 말의 근육미를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구상이었다.

미켈란젤로에게 주어진 것은 ‘카시나 전투(1364년)‘였다. 그는 정면 충돌 장면 대신 강에서 목욕 중이던 병사들이 기습 경보를 듣고 갑옷을 집어드는 순간을 골랐다. 알몸 남성의 격렬한 신체 움직임 — 미켈란젤로의 특기를 극대화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밑그림이 공개되자 피렌체의 젊은 예술가들이 몰려들어 모사하기 시작했다. 라파엘로도 그 중 하나였다.

레오나르도는 또 한 번 실험을 선택했다. 전통적인 프레스코 기법 대신 고대 문헌에서 발굴한 엔카우스틱 기법을 응용해 오일과 왁스를 혼합한 재료로 그리기로 했다. 문제는 벽면이 거대했다는 것이었다. 아래쪽 물감을 말리기 위해 대형 화덕을 피웠는데, 열기가 불균등하게 전달되면서 이미 굳은 층 위에 올린 물감들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레오나르도는 1506년 작업을 포기했다.

미켈란젤로는 밑그림까지만 완성한 채 교황 율리오 2세의 호출을 받아 로마로 떠났다. 채색은 시작하지도 못했다.

두 거장의 대결은 완성 작품이 단 한 점도 없이 끝났다.


복수극

대결이 끝났어도 싸움은 계속됐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가 완성됐을 때, 피렌체는 이 거대한 조각상(높이 약 5.17m, 무게 8.5톤)을 어디에 놓을지 결정하기 위해 당대 최고 예술가 30명으로 위원회를 구성했다. 레오나르도도 포함됐다.

레오나르도의 의견은 명확했다. 다비드는 “안뜰 안에 숨겨야” 한다, 즉 공개 광장에 세우기 부적합하다는 것이었다. 다비드는 피렌체 최중심 광장에 세워졌다. 레오나르도의 의견은 무시됐다.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노트와 『회화론』에서 직접적인 언급 대신 우회적인 저격을 이어갔다. “근육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화가는 나무 화가가 된다”는 표현. “조각 노동자는 육체적 피로로 일하고, 화가는 지적 피로로 일한다”는 구분. 당시 모든 사람이 누구를 겨냥한 것인지 알았다.

레오나르도가 모나리자를 완성했을 때 — 10년 이상에 걸쳐 작업한, 미술계 전체가 극찬한 그 작품을 보고 —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느낌이 없다.”


1504년 피렌체라는 특이점

1504년 피렌체 — 세 천재의 동시 체류

역사에는 가끔, 한 시대의 모든 에너지가 한 장소에 압축되는 순간이 있다.

1504년 피렌체가 그랬다. 레오나르도는 52세, 미켈란젤로는 29세, 라파엘로는 21세였다. 세 사람이 동시에 같은 도시에 있었다. 르네상스 역사상 이런 순간은 전에도, 후에도 없었다.

그 도시는 막 사보나롤라의 ‘허영의 불꽃’으로 예술이 대거 소각된 직후였다. 피렌체 공화국은 새 정체성을 예술로 증명해야 했고, 두 거장은 그 도구이자 라이벌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서기장으로서 계약서에 서명했고, 젊은 라파엘로는 두 사람 모두에게 영향을 받으며 조용히 성장하고 있었다.

바사리는 1500년대 중반 팔라초 베키오 내부를 증축하면서 새 프레스코로 홀 전체를 덮었다. 2012년, 연구자 마우리치오 세라시니는 바사리의 그림 뒤 숨겨진 벽에서 레오나르도 특유의 안료 성분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레오나르도의 미완성 원작이 지금도 그 벽 뒤에 있을 수 있다.

두 사람은 서로를 혐오했다. 그리고 그 혐오가 르네상스를 만들었다.


바사리의 기록은 그가 미켈란젤로의 친구였다는 점에서 미켈란젤로에게 다소 유리하게 기술되었을 수 있다. “모나리자에 느낌이 없다”는 발언 역시 직접 인용 원전이 불분명한 일화 전승이다.